기자명 이수정 기자
  • 입력 2018.06.02 05:09

딸 련금 이야기에 연신 '눈물'...문 대통령 '이산 아픔' 알아줬으면

지난 18일 김련희씨는 "법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법 때문에 사람이 고통받아선 안된다"며 현행법이 없어서 북송하지 못한다는 국정원의 입장을 규탄했다. <사진=박경보 기자>
지난 18일 김련희씨가 뉴스웍스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박경보 기자>

[뉴스웍스=이수정 기자] "8·15 전후로 올해는 꼭 평양으로 돌아갈 것 같습니다. 그렇게 믿습니다. 7년간 힘든 일도 많았지만, 남한에서 혈육의 정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아마 다른 나라에 떨어졌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지도 않았겠죠. 풍파도 있겠지만 종례엔 꼭 저를 보내주리라 생각합니다" 

2011년 탈북 브로커에게 속아 남한에 들어오게 된 김련희(49) 씨는 자신을 '평양 시민'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지난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보며 이번엔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틔웠다.

김 씨는 뉴스웍스와 인터뷰에서 인도적 북송을 희망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당당하게 말하면서도 인터뷰 중 부모님과 딸의 얘기가 나올 때면 연신 눈물을 훔쳐냈다. 또 남한의 입장과 분단의 현실을 깊이 이해하는 진중한 면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나의 아픔은 한반도 분단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남북관계에 훈풍이 부는 지금, 가족의 생이별을 더 모른척해선 안된다"고 입을 열었다.

◆ 평범한 평양 아줌마 김련희…의사 남편, 딸과 함께 단란한 가정

3형제 중 맏딸로 태어난 김련희 씨는 선자리에서 자상한 남편(52·김책공업종합대학병원 의사)과 만나 슬하에 딸 하나를 둔 평범한 아줌마였다. 어린 시절 전국 태권도 소년전에서 3등을 차지하기도 했던 딸 련금씨는 그의 기쁨이었다. 고난의 행군 때는 군의관인 남편을 따라 지방에서 힘든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이후 형편이 나아져 평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가족과 이별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2011년 6월, 간경화를 앓고 있던 김 씨는 가족방문 및 치료를 목적으로 중국 친척집에 방문했다. 흔치 않은 기회이니 만큼 병 치료를 위해 중국 병원을 찾았지만 생각보다 비싼 병원비가 문제였다. 

지난 4월 18일 남한에 살고 있는 평양 시민 김련희씨의 가족들이 자택에서 진천규 재미언론인과 만나고 있다. 왼쪽은 김 씨의 남편인리금룡(52) 김책공업종합대학병원 의사이며 오른쪽은 외동딸인 리금련(23) 려명거리 요리사다. 두 사람 사이에는 김 씨와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있다. <평양=진천규 재미언론인>

친척언니에겐 선뜻 치료비 얘기를 못 꺼내던 중 지인의 말을 들었다. 남한에서 두 달만 일하면 큰 돈을 벌 수 있고 중국에서 치료받은 후 다시 북으로 들어가면 된다고 했다. 

이에 대해 김 씨는 "당시 탈북자가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단지 병원비를 마련할 생각으로 중국에서 소개받은 브로커를 따라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신들은 '탈북자'며 '한국에 들어가면 다시 못 돌아 온다'고 했다. 그때 내가 속았단 걸 알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의 여권은 이미 다른 곳으로 넘겨진 상태였고 설상가상으로 함께 있던 탈북자들은 김씨를 풀어주면 자신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까봐 두려워했다. 또 김 씨를 속였던 브로커는 이미 없고, 조선말을 할 줄 모르는 안내자는 이탈자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결국, 그는 지리·문화적으로 가까운 남한에 와서 사정을 말하기로 한다. 

남한에 도착한 직후 합신센터로 보내졌다. 그는 "난 속아서 왔다. 도망칠 형편이 못돼 이곳까지 왔지만 여기 살 사람이 아니다.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호소했다고 했다. 단식투쟁도 했다. 

그러나 국정원 직원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겠다는 서약서를 써라. 그렇지 않으면 절대 여기서 나갈 수 없고 만약 당신이 죽어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라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결국 서약서에 사인한 김씨는 국정원을 나가 여권을 받으면 중국을 통해 북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서약서가 '나는 자유의사로 대한민국에 왔다'는 증거로 결국 자신을 옭아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하나원을 거쳐 한국 직장에서 6개월간 일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을 것이란 희망으로 버텼다. 하지만 국정원 도착 당시부터 북송을 요청한 그는 '신원특이자'로 분류돼 여권 발급이 거부됐다. 북쪽은 고사하고 한국 밖 어디도 나갈 수 없었다. 그렇게 7년이 지났다.

◆ 현행법이 없어 북송 못 한다?…NO! "법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김련희 씨는 자신이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현행법이 없어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김 씨는 "현행법이 없어서 못 보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법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법 때문에 사람이 고통받아선 안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법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가족과 살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지난 2000년 1차 비전향장기수를 북한으로 보냈을 때도 관련법은 없었다"고 언급했다.

북한 평양 신도시인 려명거리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는 리련금(23)씨는 김련희씨의 외동딸이다. <평양=진천규 재미언론인>

과거 김대중 정권은 비전향장기수들을 '가족 방문'이라는 명목으로 북송했다. 그리고 방북 기간을 무제한으로 정했다. 1차 북송된 비전향장기수들은 지금도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북에서 가족과 살고 있다. 천륜을 법이라는 울타리로 가둘 수 없었기에 선택한 일종의 대안책이었다. 

이어 김 씨는 "나를 보내지 않는 이유는 이후 따라올 후폭풍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국정원은 내가 북으로 돌아가 체제선전에 이용될 것을 우려하기도 하고, 현재 재입북을 원하는 탈북자 20%가 나같은 선례 보고 너도나도 북송을 요구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최근 어머니가 날 기다리다 완전히 실명했다. 한쪽에서는 강제억류로 생이별하게 만들고 다른 쪽에서는 이산가족상봉을 이야기하는 건 말이 안된다"며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꼭 얼굴을 보고 싶다"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가 큰 노력을 하고 있단 걸 안다. 그러나 어느 정부든지 간에 남북정세가 조금 좋아지려 하면 이산가족상봉 카드를 꺼낸다"며 "그 사람들의 뼈 깎는 아픔을 이해한다면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탈북종업원 12명·김련희 보내면 다른 탈북자들이 위험해진다?…"아니다"

김 씨는 2016년 4월 집단탈북한 종업원 12명과 관리인 1명 그리고 자신을 북으로 돌려보내면 한국에 거주하는 3만 명 탈북자의 신변이 위험해진다는 주장을 "그렇지 않다"고 일축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탈북자들은 북에 있는 가족과 교류하고 있고 재입북을 해도 그렇게 문제 될 게 없다.

그는 "탈북자 중 80~90%가 정기적으로 북한 가족들과 통화하며 지낸다. 물품과 돈도 오간다. '다음 달 엄마 생일이지? 뭐 보낼까'…이런 일상 대화도 한다. 북에 있는 탈북자 가족들이 불이익을 받았다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심지어 대구에 거주하는 한 탈북자는 북한에서 매달 생활비를 받아 쓰는 사람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 "얼마전 중국 단둥을 통해 재입북을 한 사람이 있다. 그분도 가자마자 국가보위부에서 15일 동안 조사받고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며 "북한을 악마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말이지 신변을 위협하는 그런 일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물론 북한도 다 잘하는 것은 아니다. 해외여행도 잘 못가고 자유가 제한된다. 하지만 남한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만큼 무자비하고 강요·억압당하는 사회는 절대 아니다. 그냥 사람 사는 곳이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탈북민과 실향민에 대해 말했다. 어떻게 보면 탈북민들은 국제적 수치인데 직접 그들의 아픔을 언급했다"며 "북한에 살때도 '얼마나 힘들었으면 나갔겠나'고 국가적으로 포용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北에 간다면 남북교류 도움되는 일 하고파…이산 눈물 없어지길"

김 씨는 북에 돌아가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남한 사람이 여행오면 북한을 소개하는 가이드를 하고 싶다"고 자신 있게 답했다.

그는 "7년 동안 남한에 있으면서 눈물 나게 감사한 '내 가족'이 여기도 생겼다. 내가 북한에 돌아간다고 해도 매일매일 보고 싶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게 바로 분단의 아픔이다. 남북한이 이산의 눈물을 닦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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