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태기 교수
  • 입력 2017.10.23 14:09
김태기 단국대 교수

◆한국판 혁신의 역설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가 많으면 혁신의 성과가 올라갈까? 환경이 비슷해도 제도와 정책에 따라 양자의 관계가 달라져 혁신의 역설이 생기는데 한국은 투입에 비해 성과가 낮아 음(-)의 역설이 나타난다. 미국과 유럽을 비교하면 산업규제와 노동시장규제의 차이 때문에 유럽은 혁신이 저조한 반면, 미국은 혁신이 왕성해 양(+)의 역설이 생긴다. 규제환경이 비슷하더라도 정부의 역할에 따라 혁신의 성과가 달라진다. 혁신분야 전문가인 Philip(2016)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북유럽에서도 중앙정부의 권한이 강한 스웨덴은 투입이 많은데 비해 성과가 낮은 반면, 그렇지 않은 노르웨이는 투입이 작은데 비해 성과가 높다.

한국은 OECD국가 중에서도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가 최 상위권에 속할 정도로 많지만 국가혁신시스템의 모순이 혁신의 역설을 음(-)의 방향으로 악화시킨다. 한국은 국가혁신시스템을 정부출연 연구기관과 대기업 이들의 산·학·연 협력에 집중하는 반면, 중소기업과 경제 전체로의 파급과 공유는 간과하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이중구조를 공고하게 만드는 이러한 국가혁신시스템의 모순에 따른 한국판 혁신의 역설은 지속적 성장은 물론 경제민주화나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이 실패로 돌아가는 원인이 되고 있다.

◆고장 난 국가혁신시스템

역대 정부마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국가혁신시스템이 외형적으로는 발전했다. 혁신의 성과는 경제의 역동성으로 나타나는데 한국은 후퇴했다. 한국은행(2017) 분석에 의하면 한국 경제의 역동성지수는 놀랍게도 2002년 4.48에서 2015년 1.57로 무려 3분의 1로, 기술혁신지수도 2007년 3.55에서 2015년 1.46으로 줄었다. 반면, 선진국으로부터 기술수입이 늘어났고 미국에 대한 기술무역수지 적자는 2001~2005년 연평균 20억 달러에서 2011~2015년 60억 달러로 3배나 증가했다. 지난 10년 사이에 시가 총액이 10위 기업 안에 드는 새로운 강자가 미국은 애플 등 6개나 되는데 한국은 네이버 단 하나밖에 없다.

한국의 국가혁신시스템은 중앙정부가 틀어쥐어 정부출연 연구기관은 물론 대학이 참여하는 산학연협력도 수동적이다. 또한 대기업의 혁신은 재벌체제의 특성 상 계열사끼리 협력하고 외부 기업과 접촉을 기피해 폐쇄적이다. 중소기업의 기반은 지역인데 권한이 중앙정부에 집중되어 지역차원의 산·학·연 협력이 미미하다보니 국가혁신시스템에서 중소기업은 설 땅이 없다. 정부의 지원정책은 단기 실적과 행정 편의가 앞서고 기계나 설비 등 유형 자산에 치중하기 때문에 혁신활동이 형식적이다(OECD 2011). 또한 관련 부처들의 혁신정책이 난립되어 연계성이 떨어지는데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혁신정책의 방향이 달라져 일관성이 없다. 고장 난 한국의 국가혁신시스템은 병이 더 깊어지고 있다.

◆몸에 맞지 않는 중소기업혁신정책

국가혁신시스템에 중소기업이 설 땅이 없다는 주장이 의아할지 모른다. 정부의 연구개발지원비 중에서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2011년 기준 한국은 51.6%로 독일(31.5%), 미국(11.4%), 일본(7.6%)보다 훨씬 높고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투자비율도 중소기업이 3.4%로 대기업(2.4%)보다 높으니까(김진웅박사 외, 2012) 그럴 만하다. 그러나 기술의 사업화 성공률을 보면 한국은 46%로 독일(76%)보다 낮고 중소기업은 더욱 그렇다(임재윤박사 외, 2014). 국가혁신시스템의 허점을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지원으로 메우고 자금지원정책은 중소기업 특성을 반영하지 않아 혁신의 역설이 가중된다는 점이 확인된다.

혁신을 논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나라는 미국이다. 독일이나 일본 등 선진국도 미국을 따라가려 하지만 현실에 충실해 기존의 기술을 개량시키는 점진적 혁신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처럼 과학기술이 요구되는 획기적인 혁신을 꿈꾸고 있다. Parrilli교수 등(2012)에 의하면 과학기술적 혁신은 연구소가 있고 석박사급 전문가 주도하며 혁신활동이 공식적인 반면, 기술개량 혁신은 현장의 엔지니어가 주도하고 고객과의 접촉을 통한 학습을 중시하며 비공식적인 성격이 강하다. 어떤 방법이 좋은가는 국가와 산업에 따라 다르지만 대기업은 과학기술주도가 반면, 중소기업은 현장기술주도가 유리하다.

한국은 대기업도 미국처럼 획기적 혁신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한데 불구하고 중소기업에 대해서도 연구소를 만들고 공식적인 연구개발을 통해 혁신활동을 하리라 기대한다. 혁신활동을 수행하는 직원들에 대한 직업훈련도 대기업처럼 중소기업이 별도의 장소에서 시간을 할애한다고 간주하고 직원들끼리의 학습은 우습게보고 있다. 한국의 중소기업이 혁신활동을 하는데 부딪치는 가장 큰 장애가 석·박사급 인력채용은 고사하고 비공식적인 연구개발에 필요한 숙련 인력도 확보하기 어려운데 있다. 중소기업혁신정책이 중소기업이라는 몸에 맞지 않다보니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식어가는 기업가정신

한국은 국가혁신시스템이나 혁신정책이 없던 척박한 시절 탁월한 기업가정신으로 극복했다. 세계 3대 투자자로 유명한 짐 로저스는 1999년 처음 방한하고 최근에 다시 왔는데 청년들이 창업성공률(10%정도)보다 합격률(2%)이 훨씬 낮은 공무원시험에 매달리는데 놀라워하면서 한국이 넘치는 에너지와 역동성을 잃어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기업가정신은 사회분위기에 영향을 받는 무형의 자산이다. 식어가는 기업가정신을 살리기 위해 정부는 창업의 문턱을 낮추고 지원으로 유인을 강화했다. 그러나 국제무역연구원 자료에 의하면 창업기업의 5년 생존율이 2015년 기준 한국은 27%로 독일(39%) 영국(41%)에 비해서 훨씬 낮다. 혁신의 으뜸가는 성공요인은 기업가정신에 있는데 혁신정책은 강조하면서도 정작 기업가정신을 높이는 정책은 간과했다.

세계경제포럼(2014)은 각국이 기업가정신에 대해 관심이 커졌지만 성공하려면 특정 기업에 혜택을 주는 정책이 아니라 어떤 기업이든 보편적으로 혜택을 볼 수 있는 기업가적 생태계를 만드는데 주력하고 이를 위해 정책 결정권을 가진 정부의 고위관료들부터 바뀌어 기업가적 마인드를 갖추라고 권고한다. 정부의 지원을 기대하고 창업이나 혁신활동을 하는 기업가가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받아들이며 수출시장을 개척하는 기업가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또한 기계나 설비와 같은 유형의 자산에 치우친 지원이 아니라 열정이나 경험과 같은 무형의 자산이 혁신의 동력이 되도록 지원정책도 개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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